문학을 위하여展, 인사미술공간, 서울

미술을 다시 드넓은 인간학(人間學)의 스펙트럼과 결부시키기

 

 

 

심상용 (미술사학 박사, 동덕여자대학교)

 

 

 

김승옥, 무진기행, 2006

 

 

드넓은 인간학(人間學)의 스펙트럼

미술전시의 부제가 ‘문학을 위하여’라니 의외다. 일종의 반란 같은 것일까? 회화는 조각적이어선 안 되고 조각은 회화적이어선 곤란하다는 게, 철학은 몰라도 연극이어선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게, 시(詩)나 에세이, 선동조거나 논설조여선 곤란하다는 게 정설화된 근현대미술의 미학적 행간이지 않았던가. 풍상을 겪긴 했지만, 모더니즘의 유산은 여전히 건재한 편이다. 도처에서 가장 회화적인 회화, 회화 이외의 차원이 배제된 회화는 여전한 강령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랭보나 헤밍웨이, 조정래의 언급을 넘어, 아예 문학 장에 스스로를 활짝 열어젖힌 최진아의 행보는 이례적이고 신선하기도 하다.

 

그가 접했던 적지 않은 시와 소설이 아니었던들 최진아의 영감이 오늘에 이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아니었다면, 신(神)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그만큼 덜 깊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문학이 예술의 깊이와 힘을 보여주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굳이 별도의 퍼포먼스를 준비하지 않았을 뿐, 우리 모두는 “문학가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자”하는 작가의 심경에 십분 동의하는 바에 십분 동의하는 바다. 문학예찬이 미술에 대한 상대적 홀대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영역적 사유나 장르주의적 관행에 익숙해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술과 문학, 문학과 연극, 연극과 음악, 곧 시각 기호와 언어기호, 신체기호 사이에는 생각만큼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서로 대립적인 질서로 설정하는 자체가 근대 프로젝트의 오류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이-근대프로젝트-의 결말은 장르를 도그마화하고, 영역을 우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최진아의 실험이 흥미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회화들은 문학이 시지각으로 난 길을 폐쇄하기는커녕 오히려 열어준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힌다. 수사학과 색채의 전통이 별개의 두 영역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입증한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회의적인 탐미는 오히려 고전적 데생과 색채주의의 노선으로 접어드는 경유지가 된다. 인식론의 쉽지 않은 강해들 옆에 원색과 보색의 배합, 검정 바탕에 핑크나 코발트블루의 강렬한 대비를 배치시킨다. 세심한 묘사는 그의 회화가 여전히 사물의 허구적인 재현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로 채택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오해들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하긴 그럴 용기가 없었다면, 애초에 허구인 문학을 끌어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실험들이 지극히 주관적인 사유와 취향에 기반을 둔 것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근본적인 방향전환의 암시, 즉 예술인식 상의 패러다임 전환의 증후가 반영되어 있다. 일테면 작가는 ‘새로움’이라는 미학적 캐논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과 상황에 관한 믿음직스러운 보고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미적 전위주의의 허구성, 일체의 형식주의적 노선에 대한 완화된.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문제제기가 이에 동반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은 이 주제에 있어 상대적으로 신뢰할만한 변호인인 셈이다.

 

모더니즘 제국의 뇌진탕을 확진하는 것이 최진아 회화의 본령인 것은 물론 아니다. 전위를 넘어서는 어떤 탈전위적 노선에 합류하자는 게 그의 미적 제안의 주안점인 것도 아니다. 새로운 형식,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개념, 새로운 인식 등, 지난 20세기 내내 미술이 중독되어 왔던 이러한 목록은 작가에게 하등 중요한 정거장이 아니다.

 

그를 멈춰 서도록 하는 테마는 전제에 대한 질문들이다. 시간과 변화, 현상 이전의 것들, 불변보편의 진실이요 진리다. 존재와 실존의 변하지 않는 드라마들, 삶과 죽음, 조리와 부조리, 이성과 상실, 희망과 절망, 상처와 치유… 하나같이 조변석개하는 현상의 존재적 저변, 곧 시대의 물살을 타지 않는 저 심연의 것들이다. 카뮈의 부조리와 헤밍웨이의 허무적 실존에서 C.S.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이르기까지, 카프카적 절규로부터 예수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실로 드넓은 인간학의 스펙트럼이 그의 회화가 새로이 관여하기를 희망하는 새 세상이다.

 

별도의 선택된 각본이 필요치 않은 드라마, 드넓은 삶의 지평을 무대로 삼는 연극, 바로 이것이 작가가 월계관을 씌워주고픈 미술이다. 이를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 미학논쟁의 편협한 관심사와 비교해보라! 이는 단순한 범주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요 패러다임의 문제다. 그러니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 새로운 미학의 시대를 예감해보도록 시도하자!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면서 말해보자. 부단히 안으로만 굽는, 문을 걸어 잠근 미학논쟁의 협소한 귀결들, 결국 소수의 취향 안에서만 그 의미가 확증되며, 소수의 지적 안목으로만 가치가 확인되는 불구적 미술이여 안녕!

 

‘사고할 수 없음’을 경유하기

적어도 현재까지 문학은 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암시로서 최진아가 찾아낸 적절한 비유다. 최진아에게 문학은 하나의 길이고, 노선이며 이념(理念)이기도 하다. 진정한 인간 이해로 난 길이요, 신화화된 주체를 스스로 허물고 자아의 공간에 타자를 초대해 들이는 공간이자, 독백과 웅변의 공간에 해석과 교환의 가능성을 불러들이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에게 문학은 보편성의 보루다. ‘시대와 문화와 지역을 초월해’ 인간을 말하는 서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의 서가에서 문학이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견딜 수 없이 어둡고 차가워질 것이다. 문학은 험난한 인생길 위에서 만나는 따뜻한 모닥불이자 빛나는 별과 달이다.”(최진아)

 

하지만 정작 그의 회화들은 문학의 가능성만큼이나 한계에 대한 고백에도 여백을 제공한다. (더 정확히 하자면)문학의 한계라기보다는 기호의 한계요 언어의 한계일 것이다. 문학은 언어라는 불확실한 지평 위에서 자라날 수밖에 없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최진아는 작업의 초기부터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를 인용했었다. 그 잘난 체와는 달리, 인간의 사고(思考)란 기호(언어)의 도움 없인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게 소쉬르의 지론 아니던가. 그-소쉬르-를 따르면 사고는 언어로부터 발생하고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므로, 문학은 기호의 관문을 통과하면서 겪게 되는 분절에 의해서만 구체성을 띨 수 있게 된다. 이렇듯 구조주의 언어학의 담론을 거치면서 작가는 일단 ‘합리와 상식’의 출처인 지식을 불확실성, 전복, 의심 내지는 불신으로 되돌려 보낸다. 용어들을 분열시키고 문장들을 분산시켜 사고의 해체급수를 높이고, 의미의 맬트다운(meltdown)에 접근한다.

 

최진아는 베일에 싸인 것들을 그림으로써, 사고가 아니라 사고할 수 없음의 인식론을 제안한다. 그 은폐된 오브제들은 ‘최후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로 다만 공명한다. 분명함과 분명하지 않음, 실재와 비실재, 사물과 언어 사이의 경계에 존재함으로써 이름붙이기, 곧 구조에 무릎 꿇리기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도록 교란한다. 이로 인해 독자는 기존의 명칭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는 의미의 구축에 나설 수 없게 된다. 결국 독자는 타자로 머물 권리를 압수당하고, ‘능동적 독서행위’라는 주체의 낯선 권리를 되찾는 자리로 불려나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명백한 존재감과 정체불명의 이율배반을 포괄하는, 명료하게 사고할 수 없고, 따라서 사고 자체가 사고되어야 하는 이 고단한 과정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인 경유지다.

 

기호의 척박한 토양, 문학의 퇴비

구조주의 언어학은 저자의 죽음을 몰고 왔고, 문학의 파국을 초래했다. 창작행위가 독서행위로 대체되도록 함으로써 말이다. 어차피 기호의 함정에서 허우적대긴 저자나 독자나 마찬가지니까. 그렇다면 작가의 문학예찬은 어떻게 된 것인가? 구조주의 언어학에 동의하는 동시에 문학의 신비와 권위의 신봉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결과적으론 그런 셈이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언급되어야 한다. 불확실한 기호의 지평을 넘나들면서 벌여온 문학의 사투(死鬪)가 그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문학의 역설’, 또는 ‘역설로서의 문학’의 존재론적 저변인 바, 이것이 문학을 어떤 믿음 안에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 되도록 만드는 전제인 것이다. 문학이 위험한 것이 되는 까닭도, 과학적 실체와 실증에 경사된 현대가 문학을 폄훼되거나 배제하려는 경향도 이 전제와 무관하지 않다. 모든 믿음이 주체를 진리로 인도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편으로 이끄는 믿음들도 숱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사람들에게 오로지 믿음을 통해서만 주체가 된다는 강력한 ‘요구의 전통’ 에 속하는 영역이다. 언어학이 창궐하는 반면 문학이 해체되는 것은 이 시대가 믿음을 상실했다는 결정적인 단서일 것이다. 믿음을 상실한 시대에 문학은 역설이며 두려운 역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작가에게 소쉬르적 구조주의를 따르는 것과 ‘진리로 인도하는 문학’의 후원자로 남는 것이 상충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사이에는 주체의 어떤 심오한 ‘믿음의 도약’이 작동하고 있다.

 

구조주의 담론은 의구심을 최대한도로 증폭시켰다. 실존을 넘어서는 모든 것은, 구조에 신비를 보충하려드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의심스러운 것이라는 게 이 유행을 탔던 담론의 유산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적어도’ 문학이 우리를 진정한 진리로 이끄는 힘이며 인도일 수 있는가? 기호의 척박한 토양을 계속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최진아는 그렇다고 답한다. ‘사투를 벌여온 문학’, ‘역설로서 문학’의 가능성이 사물과 기호들을 그 어둠과 불확실성으로부터 구원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물들은 여전히 명료하지 않다. 그것들은 ‘최후의 구체성’을 구성하고 있지 못하며, 기호는 의미의 성취를 기대할 수 없는 상태다. 사물과 기호들은 여전히 구원받아야만 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최진아의 최근 작품들은 사물과 기호들의 윤곽 주변을 문학적 상징성의 후광으로 둘러쌈으로써, 그것들의 요청에 값없이 부응한다. 주옥같은 문장들을 마치 광채처럼 발하는 빛의 살들이 되도록 함으로써, 사물들을 피조계(被造界)의 어둠에서 구해내고, 기호를 그 냉혹한 추위로부터 건져 올린다. 빛살들은 단절과 소외를 모자람 없이 감싸고 치유한다. 최진아에게 문학은 단지 기호와 언어의 무분별하거나 무책임한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머리를 채우는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지식들’과는 달리 ‘가슴을 채우는 불멸의 언어’로서, 고립된 사물과 척박한 기호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은혜로운 퇴비인 것이다.

 

 

문학을 위하여展, 인사미술공간, 서울, 2011.3.23~4.16